깨달음의 길, 부처님과 중생의 두 시선에서 바라본 불교

깨달음의 길, 부처님과 중생의 두 시선에서 바라본 불교

불교의 두 수레: 소승과 대승, 그리고 깨달음의 길

불교는 흔히 ‘깨달음의 종교’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가지가 아니며, 부처님과 중생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여러 층위로 이해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를 중심으로, 깨달음의 방식과 의미를 정리해 보려 합니다.


소승과 대승: 길의 차이

소승불교는 '작은 수레'를 의미하며, 주로 개인의 깨달음에 집중합니다. 소승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라한(阿羅漢)'이 되는 것입니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가 소멸된 열반의 상태에 이른 경지를 뜻하며, 수다원(果), 사다함(果), 아나함(果), 아라한(阿羅漢果) '사향사과'를 통해 이 경지에 도달합니다.

반면 대승불교는 '큰 수레'를 의미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중생의 깨달음을 추구합니다. "상구보리(求菩提) 하화중생(衆生)" 즉,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도(菩薩道)'실천합니다. 보살도를 닦아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성취하고, 궁극적으로 아뇩다라삼약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즉 무상정등각을 이룸을 목표로 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아라한이 얻는 열반의 경지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열반에 머물러 있지 않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소승불교에서 아라한은 열반에 도달함으로써 번뇌를 끊고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납니다. 하지만 대승불교의 관점에서는 열반에 머무르는 것을 완전한 깨달음으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열반에 머무르면 보리심(菩提心),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마음을 없기 때문입니다.

대승은 오히려 열반을 초월하여 중생 속으로 다시 들어가 그들을 깨달음으로 이끌 있는 지혜와 자비의 실천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Prajñā-Pāramitā, 般若波羅蜜)'입니다.


반야바라밀: 끝없는 깨달음의 완성

'반야바라밀(Prajñā Pāramitā)'은 '지혜'로 번역되지만, 그 원뜻은 훨씬 더 깊습니다. 'Prajñā'는 '계속되다(pra)'와 '알다, 깨닫다(jñā)'의 합성어로, '공성(空性)'과 '연기법(緣起法)'을 계속해서 깨달아 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Pāramitā'는 '완성되다'를 뜻하므로, 반야바라밀은 '계속 알아 나감을 완성함'을 의미하며, 이는 곧 무상정등각의 성취를 나타냅니다. 마치 산을 오르며 능선 너머에 또 다른 풍경이 있음을 깨닫듯, 반야바라밀은 현재의 깨달음이 전부가 아님을 인지하고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해 나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대승불교는 육바라밀(六波羅蜜) 수행을 통해 진리를 완성하고 아뇩다라삼약삼보리를 이룹니다.


자력과 타력: 정토의 믿음

소승불교가 스스로 깨닫는 '자각(自覺)'의 길을 걷는다면, 대승불교는 타자의 도움에 의존하는 '타력(力)'의 측면을 포함합니다. 이는 정토왕생의 믿음과도 연결되는데,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은 열반에 머물지 않고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며 중생들을 교화하고자 하는 분들입니다. 보편적으로 불교는 스스로 깨닫는 가르침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깨달은 존재의 도움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곧, 불교는 개인의 노력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함께 어우러져 성취되는 가르침이며, 부처님 없이 혼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부처님의 관점에서 본 불교: 중생을 깨닫게 하는 두 가지 길

부처님의 입장에서 불교는 중생을 깨닫게 하여 자신과 같은 부처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중생을 가르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1. 중생 속에 찾아와 깨달음의 길을 보이는 것: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직접 강림하시어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으시며 중생과 같은 모습으로 깨달음을 보여주시는 방식입니다.

  2. 중생을 부처님의 세계로 불러들여 깨달음의 길을 보이는 것: 이는 아미타 부처님처럼 중생을 오탁악세가 아닌 정토(淨土)로 불러들여 깨달음을 얻게 하는 방식입니다. 아미타 부처님은 무량한 광명과 칠보로 장엄된 극락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중생의 귀의를 유도하고, 영원한 수명을 통해 중생들을 끊임없이 제도합니다.



중생의 관점에서 본 불교: 부처님과의 만남

중생의 입장에서 불교를 살펴보면, 부처님 없이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두 가지 교화 방식에 따라 중생이 부처님께 의지하는 방법도 달라집니다.

  1. 부처님이 찾아온 경우: 과거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직접 중생 세상에 오셨을 때는 부처님의 실재를 믿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오탁악세에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므로 깨달음을 위한 노력과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 어렵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이 안 계신다'는 것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분이 안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부처와 보살은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육바라밀을 행하고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사람이며, 그들의 성품과 마음이 부처를 이룹니다.

  2. 부처님을 찾아가야 할 경우: 아미타 부처님의 경우처럼 중생이 죽은 뒤에 정토에 가서 뵙는 대상입니다. 지금 당장 아미타 부처님을 뵙기는 어렵지만, 오탁이 사라진 극락세계에서는 깨닫는 노력이 용이하고 깨달음을 이루기도 쉽습니다.



깨달음을 향한 우리의 원과 실천

이처럼 불교는 부처님의 입장과 중생의 입장에서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으며, 초기 불교의 자각적 수행과 대승불교의 보살도는 마치 종이의 양면과 같습니다. 비록 지금은 부처님이 계시지 않아 가르침을 행하기 어려운 여건일지라도, 우리는 괴로움을 해결하고 부처를 이루겠다는 강한 원(願)을 세우고 끊임없이 실천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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